1952년 5월 25일 이승만은 6·25 전쟁 중 임시수도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야당 의원들을 연행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부통령 김성수의 항거 사표와 발췌개헌 강행의 전모를 깊이 조명합니다.
인물 프로필

| 이름 | 김성수(金性洙), 호 인촌(仁村) |
| 생몰 |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 (향년 63세) |
| 출생지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인촌리 |
| 학력 |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1914) |
| 주요 이력 | 경성방직 설립(1919), 동아일보 창간(1920), 중앙학교 인수·보성전문학교 인수·인재 육성, 한국민주당 창당(1945), 초대 부통령(1951.5~1952.5), 이승만 독재에 항거 부통령 사임(1952.5.29) |
| 역사적 의의 |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에게 사표를 제출한 유일한 고위 공직자. 민족 언론·교육·경제의 3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 동시에, 일제 말기 학도병 권유 발언 등 친일 행위에 대한 논란도 존재 |
| 서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 친일 행위 논란으로 서훈 적절성 논의 존재 |
| 안장 |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
1. 1952년 5월 25일 자정 — 한국전쟁 중 부산에 계엄령이 내려지다
1952년 5월 25일 0시. 낙동강 전선에서 총성이 울리는 와중에, 임시수도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승만 정부가 내건 명분은 '공비 소탕'이었다. 하루 전날인 5월 24일 금정산에서 공비 출몰 사태가 있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을 빼앗기고 부산까지 밀린 전시 수도에서, 계엄의 진짜 목적이 금정산 공비가 아닌 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계엄이 선포된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북도 23개 시군에 곧바로 언론 검열이 실시되었다. 계엄 당일 밤부터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던 야당 의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다음날인 26일 아침에는 더욱 충격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국회에 등원하던 국회의원 40여 명이 탄 통근버스를 크레인이 통째로 들어올려 헌병대로 연행했다. "정치자금 유입으로 국제공산당에 관련되었다"는 이유였다.
전쟁 중에 적이 아닌 자국 국회의원을 군이 연행한 것이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부산정치파동'으로 기록되는 사건의 시작이었다.
2. 부산정치파동의 배경 — 재선의 길이 막힌 이승만
1952년 5월은 이승만에게 정치적 위기의 시간이었다.
1948년 제헌헌법으로 출범한 대통령 선출 방식은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접선거였다. 초대 대통령 임기 4년이 끝나가던 1952년, 이승만은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무소속이 전체 의석의 60%를 차지했고, 이들 중 다수는 이승만보다 야당에 가까웠다. 국회의원들이 뽑는 간접선거로는 재선이 불가능했다.
이승만의 해결책은 헌법 개정이었다. 1951년 11월 국회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이 개헌안을 압도적 표 차로 부결시켰다.
야당은 한 발 더 나아갔다. 1952년 4월 17일, 123명의 의원이 서명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전체 의석 3분의 2를 넘는 수였다. 이것이 통과되면 대통령은 상징적 원수가 되고 실권은 국무총리 중심 내각에 넘어간다. 이승만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승만의 전략은 직선제 개헌을 강행하는 것이었다. 직선제로 선거하면 전쟁 중 반공의 상징으로 국민적 인기가 높은 자신이 당선될 자신이 있었다. 그것을 위해 계엄이 필요했다.

3. 국제 공산당 혐의의 야당 의원들 — 그 시절의 낙인
5월 26일, 통근버스에서 끌려나온 의원들 중 12명이 "국제공산당 관련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구속된 의원은 정헌주, 서범석, 임흥순, 곽상훈, 권중돈 등이었다.
'국제공산당 관련'이라는 혐의는 그 시절의 가장 강력한 낙인이었다. 6·25 전쟁 중, 공산당 관련 혐의는 거의 사형에 준하는 낙인으로 작용했다. 실제 혐의가 있는 것과는 무관하게, 야당 의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기 위해 이 혐의를 동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회는 즉각 반격했다. 계엄해제요구결의안과 구속 의원 즉시 석방 결의안을 가결했다. 이에 맞서 이승만은 국회 해산도 불사하겠다는 압박을 가했다.
이 대결에 미국이 개입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이승만에게 국회 해산은 곧 정전협상 파탄을 의미한다고 강력히 경고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독재가 전쟁 수행에 지장을 준다고 판단했다. 국제적 압박이 커지자 이승만은 6월 4일 국회 해산을 보류한다고 표명했다.
그러나 계엄은 유지되었다.
4. 부통령 김성수의 사표 — 이승만에게 맞선 가장 용기 있는 거부
5월 29일, 이승만에게 사표 한 장이 전달되었다. 부통령 김성수였다.
"본인은 현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일인(一人)이라도 부당한 처사에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하에 현직을 사임합니다."
부산정치파동 과정에서 이승만에게 맞선 고위 공직자는 김성수가 사실상 유일했다. 수많은 관료들이 이 강압에 침묵하거나 동조했다. 그 가운데 부통령이 사표를 던진 것은 분명한 저항이었다.
김성수는 189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해 총독부 언론 통제에 맞서며 민족 여론의 광장을 만들었다. 1934년에는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오늘의 고려대학교 전신으로 키워냈다. 교육·언론·산업의 세 영역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적 역량을 축적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정치에 뛰어들었고, 1951년 초대 이시영 부통령이 이승만과 갈등 끝에 사임하자 같은 해 5월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1년 뒤인 1952년 5월 29일, 이승만에게 사표를 냈다.
5.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 — 괴한의 습격을 받은 선언대회
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도 저항은 이어졌다.
6월 20일, 이시영(전 부통령)·김성수·장면·조병옥·김창숙·신흥우·백남훈·서상일 등 재야 인사 60여 명이 부산시 남포동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언대회를 열려 했다. 그러나 선언문을 낭독하려는 순간, 괴한들이 들이닥쳐 회의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선언대회는 무산되었다.
대학생들도 일어섰다. "반공 반파쇼 민주수호"의 구호를 들고 부산 시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공비를 소탕하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을 체포하는 계엄군에 맞섰다.
한국전쟁 중 전선의 군인들이 싸우는 동안, 후방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괴한의 주먹과 계엄군의 총칼에 맞서고 있었다.
6. 발췌개헌 — 경찰이 포위한 국회의사당에서의 기립 표결
40여 일의 대치 끝에, 이승만과 야당 사이에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발췌개헌안'이었다.
발췌개헌안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양원제에 야당의 내각제 요소 일부(국무총리의 국무위원 임면 요청권, 국무위원 불신임권 등)를 덧붙인 것이었다. 이것은 기세가 꺾인 야당에게 어느 정도의 명분을 주면서 이승만이 원하는 직선제를 관철시키는 절충이었다.
1952년 7월 4일 밤, 경찰과 군인들이 부산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표결이 이루어졌다. 야당 의원들이 나흘째 의사당에 감금된 상태였다. 의사당 안에는 "유엔군이 국회를 접수하여 군정을 실시할 것"이라는 설이 퍼지고 있었다. 저항 의지가 무너진 상태에서 기립표결이 진행되었다. 재석 166명 중 163명 찬성, 기권 3명. 반대는 0명이었다.
반대 의원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이 당시 그 자리의 공기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7월 7일 제1차 개정헌법이 공포되었다. 7월 28일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8월 5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득표율 74.6%로 당선되었다.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7. 현대적 재해석 — 부산정치파동이 오늘 던지는 질문
1952년 5월 25일의 계엄령은 세 가지 방향에서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진다.
첫째, 한국 헌정사에서 최초의 위헌적 권력 연장 시도였다. 부산정치파동은 한국 정치사에서 집권자가 헌정을 파괴하며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 첫 사례였다. 야당 의원을 공산당 연루 혐의로 잡아들이고, 계엄군이 포위한 국회에서 개헌을 강행한 이 방식은, 이후 한국 권위주의 정치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패턴의 원형이 되었다.
둘째, 전쟁과 민주주의의 공존 가능성이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는 실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적과 싸우는 전쟁과,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싸움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 사건은 "전쟁 중에도 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전쟁을 빌미로 민주주의를 짓밟으려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함께 보여준다.
셋째, 거부의 용기다. 계엄이 선포되고 의원들이 끌려가는 상황에서 부통령 김성수는 사표를 냈다. 그것은 매우 작은 저항처럼 보이지만, 그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한 고위 공직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말해준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 직위를 잃을 각오를 하고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드문지를.
반독재호헌구국투쟁위원회가 선언을 시도했던 부산 남포동 국제구락부 자리는 지금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괴한들에게 쫓겨나야 했던 그 선언은, 결국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선언을 하려 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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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나다 | 5월 26일
요약
| 날짜 | 1952년 5월 25일 |
| 사건 | 부산정치파동 발발 — 이승만, 임시수도 부산 포함 23개 시군에 비상계엄 선포 |
| 명분 | 금정산 공비 소탕 (실제 목적: 직선제 개헌 강행) |
| 주요 경과 | 5.25 계엄 선포 → 5.26 국회의원 40여명 통근버스 연행 → 5.29 김성수 부통령 사표 → 6.20 국제구락부 습격 → 7.4 발췌개헌안 기립표결 통과 → 8.5 이승만 직선제로 재선 |
| 발췌개헌 표결 | 재석 166명 중 찬성 163, 기권 3, 반대 0 (경찰·군 포위 속 기립표결) |
| 핵심 인물 | 이승만(강압 주도), 김성수(부통령 사표·저항 상징), 원용덕(영남지구 계엄사령관) |
| 역사적 의의 |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위헌적 권력 연장 시도; 이후 권위주의 정치의 원형; 전시 민주주의 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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