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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헌정의 기록] 1960년 4월 18일, 혁명 전야: 고려대 학생들의 거리 행진과 깡패의 쇠몽둥이

by 오늘의 한국사 202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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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로필 — 조지훈(趙芝薰, 본명 조동탁)

생몰년 1920년 12월 3일 ~ 1968년 5월 17일
출신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학력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1941)
주요 경력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 강사,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1942),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1947~1968),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민권수호국민총연맹·공명선거추진위원회 참여
문학적 위치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 「승무」·「봉황수」·「고풍의상」 등으로 자연미와 전통 미학을 구현
4·18 관련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를 교정에서 목격, 이틀 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를 고대신문에 발표
저서 시집 『청록집』(공저),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수필집 『지조론』 등

1. 혁명 전야, 4월 18일

1960년 4월 18일 정오. 서울 고려대학교 본관 앞 인촌 김성수 동상 앞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급고(急告) — 12시 50분 전원 본관 앞에 집합할 사(事)." 교정 곳곳에 붙여진 쪽지 한 장에 응해 3,000여 명이 운집했다. 신입생 환영회 날로 위장한, 오래 준비된 시위였다.

고대신문 편집국장 박찬세가 쓴 선언문을 학생위원장 이세기가 낭독했다.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이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구호를 선창한 이기택의 목소리를 따라 3,000명의 입이 일제히 열렸다.

시위대는 교문을 나서 서울 시내를 가로질렀다. 오후 2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도착해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고, 마산에서 희생된 이들의 책임자를 처단하라. 경찰의 학원 출입을 금지하라.

그 시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지훈은 자신의 연구실 창턱에 기대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2. 3·15에서 4·18까지 — 학생들이 거리로 나선 이유

이 시위를 이해하려면 1960년 초부터 쌓인 분노를 살펴야 한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12년 장기집권의 연장을 위해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공공연한 부정을 저질렀다. 사전 투표함 바꿔치기, 3인조·9인조 집단투표 강제, 야당 참관인 축출, 유권자 협박 — 훗날 '4할 사전 투표'라 불리는 조직적 선거 조작이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터졌고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가장 결정적인 분노의 불씨는 4월 11일이었다. 3월 15일 시위 이후 실종됐던 마산상업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그 사진이 전국에 퍼지자 대학가는 술렁였다.

고려대 학생위원회는 이미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 신입생 환영회 날인 4월 16일을 거사일로 잡았으나 형사들이 학교에 들이닥쳐 행사가 취소됐다. 학생들은 다시 날짜를 4월 18일로 미루고, 그날을 기다렸다. 서울 전체 대학의 합동 시위 예정일이 4월 21일이었기에, 고려대 단독 행동은 계획보다 사흘 앞선 것이었다. 뒤처지지 않으려는 학생들의 의지가 역사를 사흘 앞당겼다.


3. 오후 7시 20분 — 천일백화점 앞의 습격

유진오 총장과 선배 이철승 의원의 설득으로 학생들은 오후 4시경 농성을 풀고 질서 정연하게 귀교 행진을 시작했다. 평화 시위였고, 귀교였다.

오후 7시 20분. 종로 4가 천일백화점(현 광장시장 인근) 앞. 학생들의 행렬이 그 앞을 지나갈 때, 인근 골목에서 60~70명의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쇠몽둥이, 쇠갈고리, 쇠망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들은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대한반공청년단장 신도환의 명을 받은 화랑동지회 소속 정치깡패들이었다. 부단장 유지광이 이끄는 패거리였다. 훗날 재판에서 밝혀진 것처럼, 고려대 학생들이 귀교할 것을 미리 알고 경찰과 사전 협의 하에 매복하고 있었다. 경호를 맡았던 경찰은 습격이 임박한 것을 알면서도 자리를 피했다.

피습으로 약 50명의 학생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쓰러진 학생들 위로 몽둥이가 내려찍혔다. "곤봉 어깨 맞다", "머리 터지다",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실신" — 2020년 문화재청이 공개한 당시 고려대 부상자 명단에 적힌 기록들이다.

동대문 경찰서가 이튿날 폭력배 8명을 연행했으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지시로 곧바로 석방했다. 자유당 정권이 사주한 폭력이었다.


4.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4월 18일 저녁, 조지훈은 오후 2시에야 거리로 나가 학생들의 행렬을 목격했다. 연구실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동안, 제자들은 이미 국회의사당 앞에 서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틀 뒤인 4월 20일, 조지훈은 고대신문에 시 한 편을 투고했다. 제목은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시는 자신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학생들이 의분에 터져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자신은 연구실 창턱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리고 고백이 이어진다. "매사에 쉬쉬하며 바른말 한마디 못한 그 늙은 탓, 순수의 초연의 탓에 어찌 가책이 없겠느냐."

청록파 시인으로서 '순수문학'을 지향해온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다.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초연함'이 결국 젊은이들로 하여금 혼자 거리에 나서게 했다는 부끄러움이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 떼에게 정치를 맡겨 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 구절은 깡패들의 습격에 분노하는 스승의 울분이기도 했다.

이 시는 단순한 추모시가 아니었다. 지식인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자기비판의 언어로 묻는 성찰의 기록이었다. 고려대 교정에 세워진 4·18 기념비문도 조지훈의 손에서 나왔다.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  - 조지훈

 

원본 한글 순화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義憤이 터져
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硏究室 창턱에 기대앉아
먼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午後 二時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는 물결이
議事堂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이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면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 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을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 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淸明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侵略을 막아내고 그러한 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民族萬代의 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現實에 눈감은 學問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先輩가 약했던 것이다 氣槪가 없었던 것이다.


每事에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純粹의 탓 超然의 탓
어찌 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한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行하기는 옳게 行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떼에게 정치를 맡겨 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례가 안다.
하늘도 敬虔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自由를 正義를 眞理를 念願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永遠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의분이 터져
노도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연구실 창턱에 기대앉아
먼 산을 넋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두 시 거리로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물결이
의사당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너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예뻐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된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너희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면 늙으면 썩는다고, 나도 썩어 가고 있는 사람,
너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은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서 자라 악을 쓰며 지켜 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드리워 있는 것을,
너희 그 청명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남울렀다는 말이다.
나라를 찾고 침략을 막아내고, 그러한 자주의 피가
흘러 젖은 땅에서 자란 너희들이 아니냐.
그 비와 이슬 속에서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너희들이 어찌
민족 만대의 바른 핏줄을 모를 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너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현실에 눈 감은 학문으로 보따리 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선배가 약했던 것이다, 기개가 없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든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순수한 체한 탓, 초연한 척한 탓—
어찌 꾸짖음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려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한 마음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할 사람은
너희들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행하기는 옳게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들에게 정치를 맡겨 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너희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니 하며 깨우치려 했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너희 마음을 우리가 안다.
너희의 공을 온 겨레가 안다.
하늘도 경건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너희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5. 4월 19일의 도화선 — 습격 보도가 바꾼 역사

그날 밤, 학생 피습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4월 19일 아침, 조선일보는 3면에 피습으로 쓰러진 학생들의 사진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석간에 "고려대생 피습, 사망자 발생" 소문을 보도했다(이는 후에 사실이 아님이 확인됐으나, 그 자체가 이미 여론에 불을 질렀다).

서울 시내 대학들의 합동 시위 예정일은 4월 21일이었다. 그러나 고려대생 피습 소식에 분노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계획을 앞당겼다. 4월 19일 오전 8시 30분,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시작했고 서울대 문리대생이 합류했다. 곧이어 전국의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경무대 앞에서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했다. 그것이 4·19 혁명이었다.

역사학자들은 4·18 고려대 시위와 피습사건이 지닌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학생 시위의 무대를 지방 고등학생에서 서울 대학생으로 확장시켰다. 둘째, 시위의 목표를 '부정선거 시정'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켰다. 셋째, 피습 소식이 다음 날 시위 참여자 수를 폭발적으로 늘린 직접적 계기가 됐다.

평화적 귀교 행진에 쇠몽둥이를 내리친 정권의 선택이, 오히려 혁명의 불꽃에 기름을 부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천 명이 부정선거에 항의해 거리에 나섰다가 자유당 사주 정치깡패에게 습격당했습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이날을 시인 조지훈의 헌시와 함께 돌아봅니다.
고려대학교에 있는 4.18 기념비


6. 현대적 재해석 — '지조론'과 지식인의 역할

조지훈의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는 오늘날에도 여러 층위에서 읽힌다.

한 층위에서 이 시는 지식인의 '방관'에 대한 고백이다. 조지훈은 평소 수필 「지조론(志操論)」에서 "지조 없는 지식인은 이 나라의 불행이자 민족의 수치"라고 썼던 사람이다. 그 자신이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민권수호운동에도 참여했지만, 4월 18일 그는 연구실에 있었다. '순수문학'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 행동을 유보했다는 자책이 시를 이끌었다.

다른 층위에서 이 시는 세대 간의 연대에 관한 성찰이다. 학생들이 거리에 나선 것은 어른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지훈은 그것을 직시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할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기성세대의 무력함과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가 함께 담긴 이 구절은, 지금도 어느 시대에나 울림이 있다.

4·18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은 이것이다. 불의한 권력이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억누를 때,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거리에 나선 3,000명의 학생들은 그 물음에 몸으로 답했다. 연구실 창가에서 먼 산을 바라보던 한 시인은 이틀 뒤 시로 답했다. 어느 쪽의 답이 더 용감했는지는 독자 각자의 몫이지만, 두 응답 모두 역사에 남았다.


7. 깡패들의 최후와 기억의 지속

습격을 사주한 임화수, 신도환, 유지광 등은 이듬해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유지광은 법정에서 자유당의 명령으로 조직적으로 동원됐음을 스스로 폭로했다. 권력이 폭력배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이 공식 재판에서 드러난 것이다.

오늘날 고려대학교는 매년 4월 18일 '4·18 구국대장정' 마라톤 행사를 통해 그날의 시위 경로를 기린다. 2020년에는 문화재청이 당시 부상자 명단을 국가문화재로 등록 추진했다. 몽둥이를 맞은 학생들의 이름과 부상 부위가 기록된 그 명단이 이제 역사의 증거물로 보존되고 있다.

"자유를 정의를 진리를 염원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 우리 영원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조지훈의 시구처럼, 4월 18일은 4월 19일의 전야가 되어 지금도 봄마다 돌아온다.


📌 오늘의 한국사 요약

  • 날짜: 1960년 4월 18일 (양력, 그레고리력 기준)
  • 사건: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 서울 시내 부정선거 규탄 시위 후 귀교 중 자유당 사주 정치깡패에게 집단 피습 — 약 50명 부상
  • 의의: 4·19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 학생 시위를 지방 고교에서 서울 대학가로,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킨 분기점